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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를 읽지 않았어도 삼국지 인물들 한두 명 정도의 이름은 모두 알 정도로 아시아에서 삼국지의 인기는 대단하다. 그중, 전설의 군사 책략가로 알려진 제갈공명에 대해 알아본다.

 

제갈량
제갈량

유비의 삼고초려

유비와 만나기 전까지 제갈량은 관직에 나가진 않았지만 형주 지역 문인들 사이에서 명성이 높은 인물이었다고 한다. 유비는 조조에 쫓겨 유표가 다스리는 형주로 도망을 왔는데, 이 시기에 그의 명성을 듣게 된 것이다. 여기서부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삼고초려'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소설에서는 유비가 장비, 관우와 같이 그의 집에 방문했고, 이 과정에서 장비가 화가 나서 집에 불을 지르자고 하는 등 소란을 피웠던 이야기가 있으나, 이는 소설이 이야기일 뿐이다. 실제로 역사서 어디에도 유비가 관우, 장비와 같이 방문하였다는 기록은 없다. 심지어 어떤 역사서에서는 제갈공명이 먼저 유비를 찾아간 것으로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다만, 정사 삼국지와 제갈량이 훗날 쓰게 되는 출사표의 기록에서 유비가 그를 세 번 방문하였다는 문구가 짧게나마 남아있는 것으로 봐서 '삼고초려' 자체는 진실이라고 여겨지고 있다.

 

남동풍을 얻어와 적벽대전을 승리로 이끌다

적벽대전에서 제갈량의 활약은 절대적이었다. 천재 지략가인 그는 주유와 조조의 대군을 막을 계책으로 화공을 같이 건의했고, 조조의 진영에 밀짚이 가득한 배만 몰고 가서 수많은 화살을 얻어왔다. 화공에 필요한 바람이 불지 않자 제사를 지내 남동풍을 불러왔고, 적벽에서 패배하며 도망치는 조조의 퇴로를 정확히 예측하여 군대를 매복, 끝까지 추격하여 조조를 사지에 몰아넣기도 했다.

 

하지만 적벽대전에서 그의 이런 신 같은 놀라운 활약 이야기들은 모두 소설에서 상상으로 만든 이야기일 뿐이다. 정사 삼국지에서 나온 적벽대전 기록에는 그에 대한 내용조차 나오지가 않는다. 다만, 유비가 도망치는 조조를 추격했다는 기록은 존재한다. 적벽대전 시기는 제갈량이 유비 수하에 있을 때였으므로, 유비 군대의 어떤 역할 정도로만 참전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단지 유비가 조조를 추격했다는 기록만으로, 적벽대전서의 제갈공명 이야기를 매우 극적이고 흥미롭게 꾸며낸 소설가의 상상력이 놀라울 따름이다.

 

계륵의 땅인 한중을 얻다

적벽대전 이후, 형주를 다스리며 힘을 얻은 유비 세력은 유장이 지배하고 있던 서촉 지역으로 진출할 계획을 세운다. 그리고 이내 유장의 항복을 받아내어 서촉 지역을 장악한 유비는 기세를 몰아 한중 지역까지 차지하려고 한다. 유비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막아야 했던 조조는 군대를 이끌고 한중 지역으로 왔고, 두 세력 간의 한중 지역을 차지하기 위한 전쟁이 시작된다.

 

제갈공명의 활약으로 전세가 유비군 쪽으로 기울어지자, 조조는 계륵이란 단어를 남기며 한중 지역에서 퇴각한다.

소설에서는 이 전쟁에서 제갈공명의 기가 막힌 계책들로 인해 유비가 승리한다고 나오지만, 이 또한 전혀 사실이 아니다. 정사 삼국지의 기록에는 한중 지역의 전쟁에서 유비 군대의 참모 역할은 다른 사람이 맡고 있었다.

 

심지어 제갈공명은 이때 한중 지역에 없었고 수도인 성도 지역에서 부대이동 및 지원, 물자 보급 등의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때 유비는 한중 지역을 얻어 한중왕 자리에 오르고, 유비 세력은 형주, 익주, 한중 지역까지 차지하며 최대 전성기를 맞이한다. 소설가 입장에서는 이런 중요하고 흥미로운 전투에 제갈공명의 이야기를 넣고 싶었을 것이고, 그가 유비 세력의 최대 전성기를 이끄는 모습을 소설에 담고 싶었을 것이다. 

 

출사표를 올리고 북으로 진군하다

유비가 죽은 후, 제갈공명은 유비의 아들을 보좌하며 국정을 이끌어갔다. 그리고 어느 정도 국력이 쌓이자 그는 그 유명한 출사표를 유선에게 올리고 위나라 정벌을 나가게 된다. 기록에 의하면 그느 8년간 5번이나 위나라를 침공했고, 5번 모두 실패하였다고 한다. 


소설에서는 이 전쟁들을 제갈공명과 사마의의 지략 대결로 흥미롭게 그리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소설만큼 흥미로운 싸움은 많이 발생하지 않았다고 한다. 사마의의 기본 전략은 성안에서 수비를 하며 굳게 지키는 것이었다. 제갈공명의 군대는 멀리 원정을 온 것이므로 성을 굳게 지키기만 하면, 그들은 군량 부족 등으로 퇴각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5번의 전쟁 모두 패배의 원인 중에 하나는 군량 부족이었다.


제갈공명이 오장원에서 치른 전쟁이 그의 마지막 위나라 정벌이 되었다. 기본적인 국력이 월등히 높은 위나라를 상대로 5번이나 전쟁을 벌일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그가 촉나라 국력을 비약적으로 발달시켰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실제로 역사서에서는 그의 군사적 능력보다 내정 능력을 더 높이 평가하는 부분들이 자주 등장한다.

 

촉나라의 내정 업무도 총괄하면서 힘든 정벌을 5번이나 지휘한 탓에 건강이 극도로 안 좋아졌을 것이다. 그는 그렇게 54세의 나이로 오장원에서 병으로 죽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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