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세종대왕. 우린 지금 이 순간에도 그가 남긴 아름다운 유산으로 소통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세종대왕
세종대왕

왕이 된 충녕

훗날, 세종이 되는 충녕대군은 태종 이방원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원래는 첫 번째 왕자인 양녕대군이 세자에 임명되면서 다음 왕위 승계에 가장 가까웠었다. 하지만 왕위를 물려받기엔 양녕대군의 비행이 너무 심하였다. 원칙을 어기고 싶지 않았던 태종은 어떻게든 양녕대군을 다음 왕으로 임명하고 싶었다.

 

하지만 신하들이 계속적으로 양녕대군의 비행을 고발하면서 세자를 폐하라 간청했다. 더 이상 어쩔 수 없었던 태종은 세자 자리를 충녕대군에게 임명한다. 실록에서도 양녕대군과 충녕대군의 얘기가 전해지는데, 높은 학식과 기품을 가지고 있던 충녕대군이 양녕대군의 행실을 자주 비판하고 충고하였다고 전해진다.


1419년 태종은 충녕대군에게 왕위를 넘겨주니, 이후 그는 우리 민족의 자랑스러운 왕인 세종대왕이 된다. 만약에 이 당시 양녕대군이 그대로 왕이 됐었어도, 충녕대군은 많은 훌륭한 저서를 남기고, 왕족으로서 조선 왕실에 보탬이 됐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었다면, 우리는 지금까지 한문으로 글을 읽고, 쓰는 일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세종대왕의 성격

세종대왕은 어릴 적부터 너무 똑똑해서 대인관계가 좋지 못하였다고 한다. 어렸을 때부터 학문적 수준이 너무 높아서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성격은 왕이 돼서 아주 좋은 방향으로 발전한다. 훗날, 한글을 만들 때나 장영실을 기용할 때, 명나라의 사대 의식에 젖은 신하들이 반대를 하면, 높은 학문적 자신감으로 그들을 무시하며 논리적으로 굴복하게 했다고 한다. 천재의 독선이 아주 올바른 방향으로 사용된 참된 예시인 것이다.

 

오직 세종대왕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업적

세종대왕의 수많은 업적 중에 단연 으뜸인 것은 한글 창제일 것이다. 한글은 각국 언어학자들로부터 극찬을 받는 글자이고, 유네스코 세계기록 유산에도 등록되어 있는 세종대왕의 위대한 업적이다. 그는 백성들이 어려운 한자를 제대로 공부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우리 민족의 글자를 만들고자 시작하게 되었다.

 

하지만 한글 창제는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명나라의 사대 정치를 하던 시대여서 자국의 글자를 만든다는 것이 자칫 명나라의 심기를 건드릴 수가 있었다. 그리고 어려서부터 평생 한문으로 사상과 학문을 공부한 유생들 입장에서도 더욱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세종대왕은 창제 작업을 강행하였고, 마침내 1446년 훈민정음을 반포하기에 이른다. 그의 높은 학문적 자신감과 자존감이 없었으면 결코 훈민정음 창제 작업은 완료될 수 없었을 것이다. 왕이 돼서도 밤낮없이 학문에 매진한 오직 그였기 때문에 가능한 업적이었다.

세종대왕이 많은 업적을 이룬 원인 중에 그의 아버지 태종 이방원의 역할도 빼놓을 수가 없다. 실제로 세종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나서도, 많은 일들을 도와주며 같이 수행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태종이 만들어놓은 왕권의 강화로 세종은 큰 반대세력 없이 정책을 수행할 수 있었다. 공신 및 외척들이 제거되어 권력자들과 그들의 수많은 당여들이 없어졌다. 이런 새로운 환경은 진보적이고 진취적인 인재들이 관직에 많이 등용되게 하였고, 이들은 세종대왕과 함께 국가의 기틀을 만들어 나갔다.

세종대왕의 죽음

세종대왕은 어렸을 때부터 육식을 아주 좋아했었다고 한다. 그가 얼마나 고기 편식이 심했으면 태종이 죽으면서도, 삼년상 중에라도 충녕은 항상 고기반찬을 먹어야 한다는 식의 유언을 남겼을 정도였다. 그리고 업무도 지나치게 많은 시간을 하였다. 하루에 5시간만 수면을 하면서 학문과 업무에 매진하였다고 한다.

 

이런 육식과 과로 때문일까. 그는 집권 후기에 매우 건강이 안 좋았다고 한다. 눈도 매우 안 좋아서 나중에는 지팡이가 없으면 걸을 수도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세자였던 문종이 아버지를 대신하여 많은 업무를 보았다고 하는데, 이런 이유로 어느 학자는 세종대왕이 이룬 많은 업적은 문종과 같이 이뤘다고 봐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결국 세종대왕은 계속된 건강악화로 1450년 2월 승하하였다. 그의 32년의 통치는 결코 짧은 재임기간은 아니지만, 그가 이룬 수많은 업적을 보면 결코 길다고 할 수 없어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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