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에서 관우는 여포, 장비와 더불어 최강의 무장으로 등장한다. 후세 사람들은 삼국지 시대에서 천년 이상 지난 오늘날에도 사당을 지어 숭배하고 있다.

관우
관우

도원결의로 맺어진 인연

한나라 말기, 유비는 혼란스러운 나라를 구원하고자 사람들을 모아 본인의 세력을 만드려고 한다. 이때, 그는 관우와 장비를 알게 되었고, 서로 뜻이 맞음을 알게 된 그들은 복숭아 밭이 넓게 펼쳐진 어느 마을에서 의형제가 되어 생사고락을 함께하기로 다짐한다.

 

이들이 서로 의형제가 된 것을 가리켜 '도원결의'라고 하고, 현재까지도 내용이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소설 이외의 역사서에서는 이들이 의형제를 맺는 과정 같은 것은 나오지 않는다. 다만, 관우와 장비는 유비를 항상 따라다니며 보호하였고, 그 관계가 마치 형제 같았다고 전한다. 심지어는 부모와 자식 같았다는 표현도 있다. 

 

이런 기록들로 미루어볼 때, 그들이 형제같이 매우 가까운 사이였던 것은 사실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다만, 복숭아 밭에서 서로 형제의 의식을 치르는 등의 표현은 소설 속의 상상력이 더해져서 만들어진 내용일 것이다.

 

조조와의 인연

유비는 서주 지역에서 조조와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도망갔고, 관우는 붙잡혀서 포로가 되었다고 한다. 비록 조조와의 전쟁에서는 패배하였지만, 유비, 관우, 장비는 이 시기에 이미 상당한 명성이 쌓여있었던 것 같다. 조조는 포로로 잡은 그를 자기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지만, 그는 유비의 거취가 파악되자 떠나버리고 만다.

 

이때 그는 조조에게 그동안의 은혜는 정말 감사하지만 유비 장군과 생사를 같이 하기로 했다는 내용의 글을 전했다고 한다. 조조 곁에는 훌륭한 장수들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조조가 관우를 이렇게까지 많이 아꼈던 것으로 볼 때, 당시 그의 명성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가 조조 곁을 떠나 유비에게로 떠나갈 때, 신하들이 조조에게 관우를 죽이자고 말했지만, 조조는 그를 그냥 보내줬다고 한다.


관우와 조조와의 일들은 여러 기록에서 확인해 볼 수 있는 사실이지만, 소설에서는 이 일을 부풀려 한층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나 더 만든다. 훗날, 적벽대전에서 패배한 조조는 유비군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다. 조조는 관우와의 군대와 마주치게 되고, 그를 상대할 수 없던 조조는 예전 자신이 그에게 은혜를 베풀었던 것을 생각해서, 자신과 자신의 부대원들을 살려달라고 애원한다.

 

의리가 강한 그는 예전 조조한테 받았던 은혜를 잊지 못하고, 이내 다 잡은 조조를 놓아주고 만다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해당 내용은 역사서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기록에는 유비가 적벽에서 패배한 조조의 군대를 추격했다는 내용만 한 줄 있을 뿐이다.

 

무력으로 신이 된 관우

관우는 키가 무려 2m나 되었고, 긴 수염과 붉은 얼굴색이 특징이었다고 한다. 그의 그림을 보면 항상 상징처럼 같이 등장하는 그의 무기인 청룡언월도는 무게가 무려 20kg 가까이 된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소설에서 그의 무력을 좀 더 극적으로 묘사하기 위해 꾸며낸 것이고,

 

실제 그는 칼을 주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또, 그와 자주 함께 등장하는 말인 적토마도 소설에서는 조조가 여포에게 뺐어 그에게 주었다고 나오지만, 역사 기록들에서는 적토마는 여포와만 같이 언급될 뿐, 그와 관련된 내용은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관우의 무력만큼은 역사서와 소설에서 모두 동일하게 최강으로 묘사된다. 삼국지 시대 이후에도 중국 역사에서 훌륭한 장수들이 많았겠지만 그만큼 강력하게 묘사되는 장수도 없다고 한다.

 

그의 무력에 대한 역사 기록에 남은 내용과, 소설로서의 삼국지의 엄청난 인기가 더해져서 그는 무력의 신, 전쟁의 신이 되었다. 실제로 중국에서는 그의 사당이 존재하고, 지금도 그를 숭배하고 있다.

관우는 형주에서 최후를 맞는다. 이때는 유비가 익주, 한중 지역까지 차지하면서 최대 전성기를 누리고 있을 때였다. 그가 죽음으로써 군사적 요충지인 형주 지역도 잃게 되었고, 결정적으로 장비와 유비도 얼마 있지 않아서 죽게 된다. 촉나라의 짧은 전성기는 삼 형제의 죽음으로써 끝나게 된 것이었다. 그의 죽음이 조금만 더 늦어져서, 익주, 한중 지역을 평정한 유비가 전력을 가다듬어서 형주 지역을 통해 위나라를 공격했으면, 중국 역사와 삼국지 소설 내용은 지금과는 많이 틀려졌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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