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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
광개토대왕

혼란한 국제 정세 속에 즉위하다

서기 391년 5월. 아버지인 고국양왕이 사망하자 고담덕은 18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다. 소수림왕과 고국양왕이 이루어놓은 안정적인 국내 상황과는 달리, 국제 정세는 크게 좋지 못하였다. 서쪽으로는 "후연"이 강성해지면서 요하 동쪽 지역과 화북 지역의 최강자가 되어 있었고,

 

남쪽으로는 백제와의 전쟁에서 고국원왕이 전사하는 등 상황이 좋지 않았다. 서북 지역에는 신흥 유목 부족인 거란이, 동북 지역에는 동부여가 각각 세력을 넓히며 고구려의 위협이 되고 있었다.


이러한 혼란한 국제 정세와 선대왕부터 안정적으로 고구려의 국력이 높아진 상황에서 고담덕이 즉위한 것이다. 한민족 역사에서 유례가 없을 최고의 정복 군주가 탄생하는 데에 최적의 조건에서 왕위를 물려받은 것이다.

 

정복 사업의 시작

즉위하자마자 군사 제도를 개편하고 바로 정복 사업을 시작하였다. 북쪽으로는 거란을 공격해 정복하였고, 남쪽으로는 백제를 공격하여 마침내 백제의 군사적 요충지인 관미성까지 함락시킨다. 사실 거란을 공격해 북쪽을 안정시킨 이유는 남쪽으로 백제를 정벌하기 위함이었다.

 

백제의 아신왕은 매년 고구려를 침공하였고, 북쪽을 안정시킨 광개토대왕은 직접 대군을 이끌고 백제 정벌을 나선 것이다. 수군, 육군으로 동시에 백제를 공격하여 50개가 넘는 성을 함락시킨다. 백제의 아신왕은 끝까지 고구려에 저항하였지만, 마침내 항복하고 광개토대왕의 영원한 신하가 되겠다는 명세를 하며 수천 명의 포로까지 바쳤다고 한다. 이 같은 백제의 굴욕은 광개토대왕에 이어 아들인 장수왕 시대까지 계속 이어지게 된다.


백제를 정벌한 광개토대왕은 다시 북쪽으로 세력을 확장한다. 북방에서의 오랜 적수인 "후연"과의 전쟁은 피할 수 없었다. 처음에는 일본(왜) 국에 공격당하고 있던 신라를 구원하고자 남쪽으로 출정을 나가 있던 사이에 공격한 "후연"에게
여러 성을 내주고 말았다.

 

그러나 신라를 구원하고 돌아온 광개토대왕은 전열을 가다듬고 "후연"을 공격하여 빼앗긴 성을 다시 수복한다. 일진일퇴를 거듭하던 후연과의 전쟁은 "후연"이 멸망하면서 끝이 나게 된다. 계속적인 "후연" 안에서의 반란과 고구려와의 오랜 전쟁으로 국력이 약해진 것이 원인으로 확인된다.


후연과 백제, 신라까지 정벌한 광개토대왕은 북동쪽에 자리 잡고 있는 동부여까지 정벌하게 된다. 60여 개의 성을 빼앗으며 동부여의 수도로 진격해 들어가자 동부여도 항복하며 고구려의 속국이 된다.


이렇게 동서남북 광활한 지역을 가로지르며 정복 사업을 펼친 광개토대왕의 눈비신 업적을 그의 아들인 장수왕이 세운 광개토대왕릉비에서도 찬양하고 있다.

 

내치에 힘쓰다

광개토대왕은 정복 사업뿐만 아니라 백성을 위한 내치에도 힘을 기울였다. 고구려 중심의 천하관을 성립하여 자신들을 하늘의 후손이라 칭하였다. 우리 민족 최초로 독자 연호를 사용한 것도 이때이다. 중국 연호를 사용하지 않고 독자 연호를 사용한 것으로도 고구려 중심의 천하관으로 민족정신을 확립하고자 함이 엿보인다.

 

이런 정신은 고구려 말기까지 이어져 수나라와 당나라와의 전쟁에서 온 국민이 하나로 뭉치는 국민성을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후삼국 시대의 궁예 기록을 보더라도 고구려 후손임을 강조하며 북벌 정책을 실시하였고, 고려나 조선의 역사를 보더라도 민족의 위기가 왔을 때, 드넓은 영토를 가졌던 고구려 정신을 기리며 위기를 극복하고자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광개토대왕의 업적이 천년 이상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우리 민족에게 깊은 의미가 되어 있는 이유인 것이다.


광개토대왕릉비에서도 내치에 힘쓴 노력을 다음과 같이 칭송하였다. "서녕기업" (백성들이 평안히 일하다), "국부민" (부강한 나라가 되어 백성들이 풍족하게 되고), "오곡풍속" (들판마다 곡식이 풍성하다). 정복의 목적이 백성들을 잘살게 하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위대한 군주의 사망

광개토대왕은 서기 413년 사망한다. 39세라는 나이에서도 알 수 있듯이 너무 젊은 나이에 맞은 갑작스러운 죽음이었다. 그의 죽음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아서 여러 추측도 존재하지만, 대체적으로 광활한 지역을 오가며 펼친 정복 전쟁으로 건강상 이상이 온 것이라는 주장이 가장 설득력이 있다.

 

동방의 알렉산더로 칭송받는 광개토대왕. 지금까지도 그의 수명이 조금만 더 길었으면 동북아의 역사가 달라졌을 것이라며 아쉬워하는 이들이 많이 존재한다. 아무튼 그는 그렇게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고, 뒤를 이어 장수왕이 아버지가 이루어놓은 업적을 기반으로 고구려 최전성기를 이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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